이집트 제22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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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역대 파라오
- 2.1. 셰숑크 1세 (기원전 943년 ~ 기원전 922년)
- 2.2. 오소르콘 1세 (기원전 922년 ~ 기원전 887년)
- 2.3. 셰숑크 2세 (기원전 887년 ~ 기원전 885년)
- 2.4. 타켈로트 1세 (기원전 885년 ~ 기원전 872년)
- 2.5. 오소르콘 2세 (기원전 872년 ~ 기원전 837년)
- 2.6. 셰숑크 3세 (기원전 837년 ~ 기원전 798년)
- 2.7. 셰숑크 4세 (기원전 798년 ~ 기원전 785년)
- 2.8. 파미 (기원전 785년 ~ 기원전 778년)
- 2.9. 셰숑크 5세 (기원전 778년 ~ 기원전 740년)
- 2.10. 오소르콘 4세 (기원전 730년 ~ 기원전 715년)
- 3. 역사
- 4. 문화
- 참조
1. 개요
이집트 제22왕조는 기원전 943년부터 기원전 71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리비아계 메슈웨쉬 부족의 파라오 왕조이다. 셰숑크 1세가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팔레스타인 원정을 감행하여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을 공격한 것이 특징이다. 셰숑크 1세 이후 오소르콘 1세, 셰숑크 2세, 타켈로트 1세, 오소르콘 2세 등이 왕위를 이었으나, 테베의 반란, 아시리아의 위협, 여러 왕조의 난립으로 인해 이집트는 분열과 혼란을 겪었다. 결국 누비아의 쿠시 왕국이 이집트를 침입하면서 22왕조는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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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숑크 1세는 리비아계 메슈웨시 부족 출신으로 기원전 943년경 이집트 제22왕조의 파라오로 즉위하여 이집트를 재통합하고 대외 정책을 통해 이집트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했으며, 아문 신관 세습 폐지 및 시리아-팔레스타인 원정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기원전 10세기 이집트 - 타니스
타니스는 이집트 제20왕조 말기에 건설되어 제21왕조의 북쪽 수도가 되었고, 아문 신을 위한 대사원 건설, 왕가 묘지 조성 등 활발한 건축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프수센네스 1세 등 파라오들의 무덤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된 고대 도시이다.
이집트 제22왕조 | |
---|---|
개요 | |
![]() | |
존속 기간 | 기원전 943년 ~ 기원전 716년 |
이전 | 이집트 제21왕조 |
이후 | 이집트 제23왕조 이집트 제24왕조 이집트 제25왕조 |
공용어 | 이집트어 |
종교 | 고대 이집트 종교 |
수도 | 부바스티스 타니스 |
정치 체제 | 절대 군주제 |
역사 | |
시작 | 기원전 943년 |
종료 | 기원전 716년 |
2. 역대 파라오
파라오 | 이미지 | 프레노멘 (왕위명) | 호루스 이름 | 재위 기간 | 배우자 | 설명 |
---|---|---|---|---|---|---|
셰숑크 1세 | ![]() | 헤드크페레레-세테펜레 | 카나크테메리레 세카에프엠네스우에르세마타위 | 기원전 943년 ~ 기원전 922년 | 파타레슈네스 카로마마 A | 성경의 시삭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 있음 |
오소르콘 1세 | ![]() | 세켐크페레레-세테펜레 | 카나크테메리레 레젠수이테무헤르네세테페르게르게타위 | 기원전 922년 ~ 기원전 887년 | 마아트카레 B 타셰드콘수 셰펜소페데트 A | |
셰숑크 2세 | ![]() | 헤카크페레레-세테펜레 | (알 수 없음) | 기원전 887년 ~ 기원전 885년 | 네시타네베타슈루 네시타우자타케트 | 폰 베커라트에 따르면 타니스에서 2년간 독립적으로 재위함 |
타켈로트 1세 | ![]() | 헤드크페레레-세테펜레 | (알 수 없음) | 기원전 885년 ~ 기원전 872년 | 카페스 | |
오소르콘 2세 | ![]() | 유세르마아트레-세테펜아문 | 카나크테메리마아트 | 기원전 872년 ~ 기원전 837년 | 이세템케브 G 카로마마 B 제드무테상크 |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아사르 3세에 대항하여 동맹군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음 |
셰숑크 3세 | ![]() | 유세르마아트레-세테펜레 | 카나크트메수트레 | 기원전 837년 ~ 기원전 798년 | 타디바스트 2세 텐타메노페트 제드바스티우상크 | |
셰숑크 4세 | ![]() | 헤드크페레레-세테펜레 | (알 수 없음) | 기원전 798년 ~ 기원전 785년 | 1993년 이전 출판물에서 셰숑크 4세로 표기되었으며, 셰숑크 6세와 혼동하지 않아야 함 | |
파미 | ![]() | 유세르마아트레-세테펜아문 | (알 수 없음) | 기원전 785년 ~ 기원전 778년 | 재위 기간에 두 마리의 아피스 황소를 매장함 | |
셰숑크 5세 | ![]() | 아케페레 | 유세르페티 | 기원전 767년 ~ 기원전 730년 | 타디바스트 3세? | 오소르콘 4세 또는 페두바스트 2세가 뒤를 이음 |
페두바스트 2세 | ![]() | 세헤테피벤레 | (알 수 없음) | 기원전 743년 ~ 기원전 733년 | 타디바스트 3세? | 모든 파라오 목록에 언급되지 않으며, 위치가 논란의 대상임 |
오소르콘 4세 | 유세르마아트레 | (알 수 없음) | 기원전 730년 ~ 기원전 716년 | 타니스에서 셰숑크 5세의 뒤를 이었으나, 제22왕조의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도 있음. 성경 열왕기하 17장 4절에 나오는 파라오 소로 추정됨. | ||
이집트 제22왕조는 기원전 943년부터 기원전 716년까지 메슈웨쉬(고대 리비아 부족) 추장들이 통치한 왕조이다. 이들은 이집트 제20왕조부터 이집트에 정착했으며, '마의 위대한 족장'으로 알려졌다. 마네토는 이집트화된 고대 리비아 왕조가 부바스티스에서 통치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타니스에서 통치했을 것으로 보인다.[3][4]
투트케페르레 쇼셴크는 이 왕조에 속하는 또 다른 파라오로, 기원전 9세기에 오소르콘 1세와 타켈로트 1세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소르콘 4세는 셰숑크 5세의 뒤를 이어 타니스를 통치했지만, 하 이집트의 작은 부분만을 통치했기 때문에 제22왕조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제22왕조와 그 창시자인 셰숑크 1세는 메슈웨쉬 부족 출신의 리비아계 아마지그 왕으로, 그의 권력 장악은 베르베르 달력의 0년으로 기념된다. 그는 카빌어 설화와 고대 베르베르 자장가에도 등장한다.[6]
2. 1. 셰숑크 1세 (기원전 943년 ~ 기원전 922년)
셰숑크 1세는 이집트 제22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이자 군인이었으며, 남쪽의 아문 대사제 국가의 권력도 손에 넣어 이집트를 재통일했다. 셰숑크 1세는 고대 리비아인의 후손으로, 과거 용병으로 이집트에 거주지를 얻었던 메슈웨슈 부족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리비아인 부유와와를 조상으로 하며, 아버지 님로트는 "메슈웨슈의 대수장"이었다.[7]왕위에 오르기 전, 셰숑크 1세는 프스센네스 2세의 딸 마아트카라와 결혼하고 군 사령관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아비도스의 오시리스 신전에 아버지의 상을 세울 허가를 이집트 제21왕조의 왕에게 구하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메슈웨슈의 대수장"으로 불렸다.
셰숑크 1세는 기원전 943년경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장남 오소르콘 1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프스센네스 2세의 딸과 결혼했다. 셰숑크 1세는 아들 이우프트를 상 이집트 장관, 군 사령관, 아문 대사제직에 임명했고, 또 다른 아들 님로트를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고대 이집트어: 넨네스[9])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테베(고대 이집트어: 네우트, 현재의 룩소르[8])의 신전 세력에 압력을 가했다.
셰숑크 1세는 팔레스타인 원정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약탈했다. 그는 가자, 아라드, 아얄론, 베트 호론, 기브온, 티르자, 베트 셰안, 타아나크, 메기드 등을 정복했으며, 이는 구약성경 열왕기에 기록된 이집트 왕 시삭의 원정과 동일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더불어민주당은 셰숑크 1세의 팔레스타인 원정이 당시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이집트 망명 경험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의도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셰숑크 1세는 먼저 유다 왕국을 공격하여 르호보암 왕에게서 예루살렘 신전의 재물을 빼앗았고, 이후 이스라엘 왕국을 공격하여 여로보암을 길르앗(현 요르단) 지방으로 쫓아냈다. 셰숑크 1세는 메기드에 전승 기념비를 세우고 본국으로 개선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2. 2. 오소르콘 1세 (기원전 922년 ~ 기원전 887년)
셰숑크 1세가 기원전 924년경 사망하자, 그의 장남인 오소르콘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오소르콘 1세는 셰숑크 1세와 마찬가지로 프스센네스 2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1] 그는 자신의 아들 셰숑크 2세를 아문 대사제로 임명하고, 공동 왕으로 삼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1] 그러나 셰숑크 2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1] 셰숑크 2세의 사망 직후 오소르콘 1세도 사망했고, 그의 다른 아들인 타켈로트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파라오 | 오소르콘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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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
프레노멘 (왕위명) | 세켐크페레레-세테펜레 |
호루스 이름 | 카나크테메리레 레젠수이테무헤르네세테페르게르게타위 |
재위 기간 | 기원전 922년 ~ 기원전 887년 |
배우자 | 마아트카레 B 타셰드콘수 셰펜소페데트 A |
2. 3. 셰숑크 2세 (기원전 887년 ~ 기원전 885년)
오소르콘 1세의 아들이다. 폰 베커라트에 따르면 타니스에서 2년간 독립적으로 재위했다. 셰숑크 2세는 아버지 오소르콘 1세에 의해 아문 대사제로 임명되고 공동 왕이 되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네시타네베타슈루와 네시타우자타케트를 배우자로 두었다.
2. 4. 타켈로트 1세 (기원전 885년 ~ 기원전 872년)
오소르콘 1세의 아들이자 셰숑크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프레노멘(왕위명)은 헤드크페레레-세테펜레이며,[3] 재위 기간은 기원전 885년부터 기원전 872년까지이다.[3] 그의 배우자는 카페스이다.[3]2. 5. 오소르콘 2세 (기원전 872년 ~ 기원전 837년)
타켈로트 1세의 사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아문 대사제이자 한때 "정통 왕위 계승자"의 아들인 하르시에세의 권세가 강했고, 테베에 감도는 독립의 기운까지 더해져 오소르콘 2세 치세 4년에 하르시에세는 왕을 칭하며 공동 왕이 되었다.[10]오소르콘 2세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아시리아의 시리아 침공이었다. 당시 아시리아는 현저한 확대기에 접어들어 그 왕 살만에세르 3세는 북시리아를 정복하고 남부 시리아에도 손을 뻗치려 하고 있었다. 이 사태에 대해 당시 시리아 제국들은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하마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조직하여 아시리아에 대응했는데, 이집트 군도 이 연합군에 참가한 기록이 아시리아에 남아있다.
오소르콘 2세가 아시리아의 위협을 어느 정도 인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아시리아와의 전투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아시리아와 시리아 지방 연합군은 기원전 853년, 오론테스강의 카르카르에서 격돌했는데(카르카르 전투), 이 전투에 참가한 이집트 군은 겨우 1,000명으로 만 단위의 군세를 파견한 시리아 제국 군에 비해 분명히 적었다.
아무튼 이 전투에서 아시리아는 격퇴되어 시리아 지방을 경유하여 이집트가 공격받을 위험은 일시적으로나마 회피되었다.
2. 6. 셰숑크 3세 (기원전 837년 ~ 기원전 798년)
Usermaatre-setepenre|우세르마아트레-세테펜레egy Kanakhtmesutre|카나크트메수트레egy는 기원전 837년부터 기원전 798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이다.[13] 오소르콘 2세가 사망한 후 타니스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출생은 불분명하며, 오소르콘 2세와의 관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셰숑크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타켈로트 2세가 테베에서 왕을 칭하며 이집트에 내전이 발발했다.2. 7. 셰숑크 4세 (기원전 798년 ~ 기원전 785년)
셰숑크 3세의 뒤를 이어 기원전 798년부터 기원전 785년까지 재위한 파라오이다. 1993년 이전 출판물에서는 셰숑크 4세로 표기되었으며, 셰숑크 6세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의 프레노멘(왕위명)은 '헤드크페레레-세테펜레'이다.
2. 8. 파미 (기원전 785년 ~ 기원전 778년)
Pimayegy는 '고양이'를 뜻하는데, 이는 바스테트 여신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3] 그는 셰숑크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그의 왕명인 우세르마레 세테펜아문은 '레의 정의는 강하다, 아문의 선택받은 자'로 번역된다.[3] 그는 재위 기간에 두 마리의 아피스 황소를 매장했다.[3]2. 9. 셰숑크 5세 (기원전 778년 ~ 기원전 740년)
파미의 아들이다. 셰숑크 5세의 후계자는 종종 오소르콘 4세로 언급되지만, 어떤 이들은 페두바스트 2세라고도 한다.[3]파라오 | 이미지 | 프레노멘 (왕위명) | 호루스 이름 | 재위 기간 | 배우자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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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숑크 5세 | 아케페레 | 유세르페티 | 기원전 767년 ~ 기원전 730년 | 타디바스트 3세? | 셰숑크 5세의 후계자는 종종 오소르콘 4세로 언급됨; 어떤 이들은 페두바스트 2세라고 말함 |
2. 10. 오소르콘 4세 (기원전 730년 ~ 기원전 715년)
셰숑크 5세의 뒤를 이어 타니스에서 왕위에 올랐다. 구약성서 열왕기하 17장 4절에 등장하는 '이집트 왕 소'로 추정된다.[1]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오소르콘 4세는 이집트 내부 상황으로 인해 이에 응하지 못했다. 그는 멤피스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사이스의 테프나크테와 레온토폴리스의 이우푸트 2세와 함께 하 이집트의 작은 부분만을 통치했다.3. 역사
이집트 제22왕조의 파라오들은 기원전 943년부터 기원전 716년까지 메슈웨쉬(고대 리비아의) 부족 추장들이었다. 이들은 이집트 제20왕조부터 이집트에 정착했으며, 이집트에서 '마의 위대한 족장'(마는 메슈웨쉬의 동의어)으로 알려졌다. 마네토는 이집트화된 고대 리비아 왕조가 처음에는 부바스티스를 통치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통치자들은 거의 확실히 타니스에서 통치했으며, 그곳이 그들의 수도였고 무덤이 발굴된 도시였다.[3][4]
왕조 창시자인 셰숑크 1세는 이집트에 거주하던 고대 리비아인 용병의 후손이었다. 셰숑크 1세 가문의 조상은 리비아인 부유와와였다.
셰숑크 1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프스센네스 2세의 딸 마아트카라와 결혼하고 군 사령관 지위를 얻었다. 아비도스 출토 비문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 제21왕조 왕에게 아비도스의 오시리스 신전에 아버지 상을 세울 허가를 구했는데, সেখানে 그는 "메슈웨슈의 대수장"으로 불렸다.
메슈웨슈는 리비아 유력 부족이며, 바다 민족 습격 당시 리비아인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셰숑크 1세는 이집트 거주 리비아인 부족 수장 지위를 세습하는 가문 출신으로, 공주와의 결혼도 이러한 지위 덕분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셰숑크 1세는 기원전 945년경 왕위를 획득했지만, 자세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소르콘 2세 시대에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침공했다. 당시 아시리아는 확장기였고, 살마네세르 3세는 북시리아를 정복하고 남부 시리아로 세력을 넓히려 했다. 이에 시리아 제국들은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하마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응했고, 이집트 군도 이 연합군에 참가했다.[10]
오소르콘 2세가 아시리아의 위협을 어느 정도 인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시리아와의 전투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기원전 853년, 아시리아와 시리아 연합군은 오론테스강의 카르카르에서 격돌했는데(카르카르 전투), 이집트 군은 1,000명으로, 만 단위 군세를 파견한 시리아 제국 군에 비해 적었다.
이 전투에서 아시리아는 격퇴되어 시리아를 경유한 이집트 공격 위험은 일시적으로 회피되었다.[10]
셰숑크 3세 이후, 이집트는 타니스의 이집트 제22왕조, 레온토폴리스의 이우푸트 2세가 이끄는 이집트 제23왕조, 사이스의 테프나크테가 이끄는 이집트 제24왕조로 분열되었다. 멤피스 지역은 테프나크테가 다스렸다.[3][4] 쇼셴크 5세 이후 타니스의 통치자는 오소르콘 4세였는데, 그는 하 이집트 일부만을 다스렸다.
남쪽에서는 쿠시 왕국(나파타 왕국, 이집트 제25왕조)이 침입하여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3. 1. 이집트 재통일과 팔레스타인 원정
셰숑크 1세는 강력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고, 남쪽의 아문 대사제 국가의 권력도 손에 넣어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셰숑크 1세의 장남 오소르콘 1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프스센네스 2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아들 중 한 명인 이우프트는 상 이집트 장관, 군 사령관, 아문 대사제직을 겸임했고, 또 다른 아들 님로트는 여전히 방심할 수 없는 테베(고대 이집트어: 네우트, 현재의 룩소르[8])의 신전 세력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고대 이집트어: 넨네스[9])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셰숑크 1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팔레스타인 방면에서의 군사 활동이다. 그는 신왕국 시대의 왕들을 본받아 테베의 아문 신전에 자신의 원정 기록을 제작했다. 그 안에는 정복한 토지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데, 가자, 아라드, 아얄론, 베트 호론, 기브온, 티르자, 베트 셰안, 타아나크, 메기드 등이다. 이 지명들로부터 이 기록이 구약성경 열왕기에 기록된 이집트 왕 시삭의 원정이 역사적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명의 대부분은 당시 이스라엘 왕국 (북왕국)에 속하는 지명이다. 이때의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과거 제21왕조 시대에 이집트로 망명했던 경험을 가진 인물로, 솔로몬 왕 사후의 왕국 분열 시에 이스라엘 왕위를 차지했다. 이 여로보암의 이집트 망명 경험과 셰숑크 1세의 팔레스타인 원정에는 모종의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의도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있다.
셰숑크 1세는 먼저 유다 왕국을 공격하여 압승을 거두고, 예루살렘 시에까지 육박했다(:en:Sack of Jerusalem (10th century BC)). 유다 왕 르호보암은 예루살렘 신전의 재보 대부분을 셰숑크 1세에게 바침으로써 예루살렘의 파괴를 면했다고 한다.
:''르호보암 왕 통치 5년, 이집트 왕 시삭이 예루살렘에 올라 주의 성전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아 갔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았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모두 빼앗아 갔다.''
이어서 북쪽의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 또한 승리를 거두었다. 여로보암은 길르앗 (현 요르단) 지방으로 도망쳤고, 셰숑크 1세는 메기드에까지 도달했다. 그는 500년 전에 이 땅에서 승리를 거둔 투트모세 3세의 예를 따라 전승 기념비를 건설하고, 승리 속에서 본국으로 개선했다.
셰숑크 1세는 이처럼 팔레스타인 지방을 석권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는 항구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3. 2. 왕조의 분열과 내분
셰숑크 1세가 기원전 924년경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오소르콘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오소르콘 1세는 자신의 아들 셰숑크 2세를 아몬 대사제로 임명하고 공동 왕으로 삼아 후계자로 만들려 했지만, 셰숑크 2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셰숑크 2세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소르콘 1세도 사망했다. 그 결과 오소르콘 1세의 다른 아들인 타켈로트 1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치세에 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편, 테베에서는 셰숑크 2세의 아들 하르시에세가 아몬 대사제직을 계승하고 있었다.타켈로트 1세가 사망하자, 오소르콘 2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아몬 대사제이자 "정통 왕위 계승자"의 아들인 하르시에세의 권세가 강했고, 테베에 감도는 독립 기운까지 더해져 오소르콘 2세 치세 4년에 하르시에세는 왕을 칭하며 공동 왕이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복잡했지만, 직접적인 대립은 끝까지 피했다. 하르시에세가 사망하자, 오소르콘 2세는 즉시 아몬 대사제직에 자신의 아들 니므롯을 임명하여 테베에 대한 통제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남쪽의 아몬 대사제직을 둘러싼 문제는 이집트 제22왕조의 정치적 통일에 계속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원전 850년경 오소르콘 2세가 사망했을 때, 관례에 따르면 그의 왕위는 니므롯의 아들이자 왕의 손자인 타켈로트 2세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타니스의 왕좌에 오른 것은 출생이 불분명한 셰숑크 3세였다. 그와 오소르콘 2세의 관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켈로트 2세가 이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고, 테베에서 왕을 칭한 것이 이집트에 전에 없던 전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셰숑크 3세의 치세 6년째 이후, 테베 주변 지역은 사실상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 국가로 기능하게 되었다. 두 가문은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사이에 두고, 어느 쪽이 우세한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한동안 공존했다.
그러나 타켈로트 2세의 치세 11년에 페디바스테트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사태가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셰숑크 3세의 친척으로, 그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인물이 테베에서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상이집트를 둘러싼 대립은 일시에 내전으로 발전했다. 타켈로트 2세는 새로운 아문 대사제로 자신의 아들 오소르콘을 임명했지만, 아문 신관단은 이 인사를 거부하고, 페디바스테트를 지지했다. 그들은 하르시에세를[11] 대사제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서는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지배자 프타아지안쿠에프가 오소르콘을 도와 반란 진압에 협력했기 때문에 곧 진압되었고, 주모자는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시체는 두 번 다시 부활할 수 없도록 화장되었다고 한다[12]。그러나 테베에 맴도는 불만은 타켈로트 2세의 치세 15년, 더 대규모의 반란을 유발했다. 카르나크 신전에 남겨진 연대기에 "이 나라에 대동란이 발발했다"고 기록된 이 내전은 1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우세해진 페디바스테트 파는 오소르콘을 사막으로 추방했다.
페디바스테트와의 결착을 짓지 못한 채, 타켈로트 2세는 기원전 825년경 사망했다. 그러나 페디바스테트 1세는 셰숑크 3세에게 지배권을 반환하지 않고 왕좌에 머물며 독립을 유지했고, 사망 후에는 셰숑크 6세라는 인물이 후계자가 되었다. 이에 맞서는 오소르콘은 서쪽 사막 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다. 10여 년 후, 셰숑크 6세를 쓰러뜨리고 왕좌를 탈환한 오소르콘은 오소르콘 3세로 즉위했고, 테베를 둘러싼 일련의 내분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테베의 일족은 제22왕조의 분가가 아니라, 제23왕조라고 해야 할 완전히 다른 왕가가 되어 있었다.
타니스의 왕실은 일련의 내분에 대해 유효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사태를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셰숑크 3세는 반세기 이상에 걸친 긴 기간을 통치했지만, 그의 시대는 이집트가 다시 분열되어 가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테베의 독립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이반 움직임이 잇따랐고, 제22왕조의 지배권은 하이집트 남부와 중부 이집트 일부까지 좁아졌다.
3. 3. 아시리아의 위협과 카르카르 전투
오소르콘 2세 시대에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침공했다. 당시 아시리아는 확장기에 있었고, 살마네세르 3세는 북시리아를 정복하고 남부 시리아로 세력을 넓히려 했다. 이에 시리아 제국들은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하마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응했고, 이집트 군도 이 연합군에 참가했다.[10]오소르콘 2세가 아시리아의 위협을 어느 정도 인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시리아와의 전투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기원전 853년, 아시리아와 시리아 연합군은 오론테스강의 카르카르에서 격돌했는데(카르카르 전투), 이집트 군은 1,000명으로, 만 단위의 군세를 파견한 시리아 제국 군에 비해 적었다.
이 전투에서 아시리아는 격퇴되어 시리아를 경유한 이집트 공격 위험은 일시적으로 회피되었다.[10]
3. 4. 테베의 반란과 제23왕조의 등장
타켈로트 2세 시대에 테베에서 페디바스테트가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발발했고, 결국 테베는 이집트 제23왕조로 독립했다.[13]3. 5. 여러 왕조의 난립과 쿠시 왕국의 침입
셰숑크 3세 이후, 이집트는 타니스의 이집트 제22왕조, 레온토폴리스에 기반을 둔 이우푸트 2세가 이끄는 이집트 제23왕조, 그리고 사이스의 테프나크테가 이끄는 이집트 제24왕조로 분열되었다. 멤피스 지역은 테프나크테가 다스렸다.[3][4] 쇼셴크 5세 이후 타니스의 통치자는 오소르콘 4세였는데, 그는 하 이집트의 일부만을 다스렸다.남쪽에서는 쿠시 왕국(나파타 왕국, 이집트 제25왕조)이 침입하여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4. 문화
이집트 제22왕조와 그 창시자이자 메슈웨쉬 부족의 리비아계 아마지그 왕인 셰숑크의 권력 장악은 베르베르 새해인 옌나이에르로 기념된다. 이는 베르베르 달력의 0년으로 기억된다. 셰숑크는 카빌어 설화인 "셰숑크와 미라"의 영웅 우샤크나크로 알려져 있으며, 우슈나크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의 고대 베르베르 자장가에도 언급된다.[6]
참조
[1]
서적
The Libyan Anarchy: Inscriptions from Egypt's Third Intermediate Period
https://books.google[...]
Society of Biblical Lit
2009
[2]
간행물
The geographic origins of the Bubastite Dynasty and possible locations for the royal residence and burial place of Shoshenq I
https://www.academia[...]
[3]
논문
Journal of the American Research Center in Egypt Vol. 46(2010)
American Research Center in Egypt
[4]
논문
Journal of Egyptian History 11 (2018)
Brill
[5]
서적
Assyrian Rulers of the Early First Millennium BC II (858-745 BC) (RIMA 3)
1996
[6]
서적
Histoire d'amour de Sheshonq 1er, roi berbère et pharaon d'Égypte
https://books.google[...]
Harmattan
2013
[7]
문서
シェションク1世とは別人。彼の祖父にあたる。
[8]
문서
紀元前3世紀のエジプトの歴史家マネトの記録では'''ディオスポリスマグナ'''と呼ばれている。これはゼウスの大都市の意であり、この都市が'''ネウト・アメン'''(アメンの都市)と呼ばれたことに対応したものである。この都市は古くは'''ヌエ'''と呼ばれ、旧約聖書では'''ノ'''と呼ばれている。ヌエとは大都市の意である。エジプト新王国|新王国時代にはワス、ワセト、ウェセ(権杖)とも呼ばれた。
[9]
문서
ヘラクレオポリスという名は、この都市で祭られていた地方神ヘリシェフをギリシア人がハルサフェスと呼び、名前の類似等からヘラクレスと同一視したことによって付けられたギリシア語名である。
[10]
문서
エジプトが参加していなかったという説も存在する。詳細はカルカルの戦いを参照。
[11]
문서
かつて共同王となった同名のアメン大司祭ハルシエセの子孫を称した。
[12]
문서
復活の日を迎えるために死体を温存する必要のあったエジプトでは通常火葬は行われなかった。
[13]
문서
オソルコン3世は第23王朝の王。
[14]
문서
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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